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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들레
작성일 2007-01-10 (수)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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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4873   
명자꽃 - 안도현

사진 : 네이버 카페 '곤충나라 식물나라'  http://cafe.naver.com/lovessym.cafe
 
 
명자꽃
- 안도현
 
 
그해 봄 우리 집 마당가에 핀 명자꽃은 별스럽게도 붉었습니다
옆집에 살던 명자 누나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누나의 아랫입술이 다른 여자애들보다 도톰한 것을 생각하고는 혼자 뒷방 담요 위에서 명자나무 이파리처럼 파랗게 뒤척이며
명자꽃을 생각하고 또 문득 누나에게도 낯설었을 初經(초경)이며 누나의 속옷이 받아낸 붉디붉은 꽃잎까지 속속들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꽃잎에 입술을 대보았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내 짝사랑의 어리석은 입술이 칼날처럼 서럽고 차가운 줄을 처음 알게 된
그해는 4월도 반이나 넘긴 중순에 눈이 내린 까닭이었습니다
하늘 속의 눈송이가 내려와서 혀를 날름거리며 달아나는 일이 애당초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명자 누나의 아버지는 일찍 늙은 명자나무처럼 등짝이 어둡고 먹먹했는데 어쩌다 그 뒷모습만 봐도 벌 받을 것 같아
나는 스스로 먼저 병을 얻었습니다
나의 樂(약)은 자리에 누워 이마로 찬 수건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어린 나를 관통해서 아프게 한 명자꽃,


그 꽃을 산당화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될 무렵
홀연 우리 옆집 명자 누나는 혼자 서울로 떠났습니다
떨어진 꽃잎이 쌓인 명자나무 밑동은 추했고, 봄은 느긋한 봄이었기에 지루하였습니다
나는 왜 식물도감을 뒤적여야 하는가,
명자나무는 왜 다닥다닥 紅燈(홍등)을 달았다가 일없이 발등에 떨어뜨리는가,


내 불평은 꽃잎 지는 소리만큼이나 소소한 것이었지마는
명자 누나의 소식은 첫 월급으로 자기 엄마한테 빨간 내복 한 벌 사서 보냈다는 풍문이 전부였습니다
해마다 내가 개근상을 받듯 명자꽃이 피어도 누나는 돌아오지 않았고,
내 눈에는 전에 없던 핏줄이 창궐하였습니다


명자 누나네 집의 내 키만 한 창문 틈으로 붉은 울음소리가 새어나오던 저녁이 있었습니다
그 울음소리는 自盡(자진)할 듯 뜨겁게 쏟아지다가 잦아들고 그러다가는 또 바람벽 치는 소리를 섞으며 밤늦도록 이어졌습니다
그 이튿날, 누나가 집에 다녀갔다고, 애비 없는 갓난애를 업고 왔었다고 수런거리는 소리가
명자나무 가시에 뾰족하게 걸린 것을 나는 보아야 했습니다
잎이 나기 전에 꽃 몽우리를 먼저 뱉는 꽃,
그날은 눈이 퉁퉁 붓고 머리가 헝클어진 명자꽃이 그해의 첫 꽃을 피우던 날이었습니다

 
 

???    
이름아이콘 민들레 왈(曰)
2007-01-10 20:07
진홍색은 늘 애잔한 슬픔과 잊히지 않는 기억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명자누나=명자꽃, 양변에서 명자를 빼버리면 누나=꽃이군요.
떨어진 꽃잎이 쌓여 추해진 밑동과 다닥다닥 홍등을 달았다가 일없이 발등에 떨어뜨리는 명자꽃은
첫사랑 누나에 대한 불길한 예감입니다.
 
풍문만 있을 뿐, 명자꽃이 피어도 누나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어느날 붉은 울음소리를 밤늦도록 듣습니다.
내 첫사랑은 어느새 명자나무의 뾰족한 가시에 걸리고...
하지만 잎보다 꽃을 먼저 피는 누나가 다시 꽃을 피웁니다.
누나는 헝클어졌지만... 여전히 내눈이 퉁퉁 붓고... 말입니다.

스토리를 빼고서라도 명자꽃에 대하여 이토록 절묘한 통찰이 있을까 싶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내게 열병으로 다가온 명자꽃... 그러나 해마다 피면서 개근상을 받는군요.
·별·스·럽·게· 붉으면서 파란 이파리를 달고 있는 명자꽃.

봄이되면 우리집 마당에도 별스럽게 붉은 꽃이 필 것입니다.
지난 해 심으면서 마뜩찮았던 기억이 있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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