볶은 흙 한줌
 
인도의 어떤 왕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해 궁궐의 정원사가 죽자 왕은 나라 전역에 포고령을 내려 새 정원사 한 명을 뽑았다.
왕이 직접 뽑은 그 정원사의 솜씨는 정말 대단했다. 단번에 병든 화초를 가려냈고, 그의 손이 스쳐만 가기만 해도 시들던 꽃이 생기를 얻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부지런했다. 잠시도 정원 가꾸기를 쉬지 않아서 손이 흙투성이였다.
하루는 왕이 정원으로 산보를 나왔다. 정원사는 그때도 병든 꽃나무들을 돌보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왕이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떤가, 살아나겠는가?"
"예, 새벽에 맑은 이슬이 내렸고, 지금은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으니 곧 소생할 것입니다."

정원사가 공손히 대답했다. 그런데 그 대답하는 투가 왕의 귀에는 왠지 거슬렸다. 신하로부터 이런 식의 대답은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예, 폐하의 덕분입니다. 이렇게 몸소 나오셨으니 곧 되살아나고말굽쇼."
신하들은 늘 이런 식으로 대답을 해왔던 것이다. 왕은 언짢은 기분을 애써 참으며 그냥 지나쳤다.
그 뒤 또다른 날, 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궁 안을 거닐다가 또 정원사와 마주쳤다.
왕이 둘러보다가 한 마디 했다.

"나비들이 전보다 많아졌군."
정원사가 공손히 대답했다.
"예, 향기를 풍기는 꽃송이들이 늘었으니까요."

"못 보던 새들도 부쩍 늘었어."
"그만큼 숲도 더 우거졌습니다."

그때였다. 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갑지가 언성이 높아졌다.
"전혀 내 덕분이 아니란 말이렸다!"
"예?"

정원사가 비로소 고개를 들고 의아한 시선으로 왕을 올려다보았다. 뒤따르던 신하들도 덩달이 눈꼬리를 치켜올리더니, 그에게 삿대질을 해댔다.
"이자가 감히 뉘 앞에서!"
"폐하의 은공도 모르는 이자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화가 잔뜩 난 왕이 그 즉시 명령했다.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 여봐라, 이자를 당장 옥에 가두어라!"
그 즉시 병사들이 달려들어 정원사를 단단히 포박했다.

묶인 정원사에게 왕이 말했다.
"네가 그렇게 잘났느냐? 어디 내 덕 없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나 한번 보자. 감옥에서 꽃 한 송이만 피우면 너를 풀어주겠다."
왕의 말을 듣고 난 정원사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시면, 저에게 흘 한 줌만 주십시오."
왕이 조롱하듯 말했다.
"오냐, 볶은 흙을 주마. 하하하!"

정원사는 곧 감옥 안으로 끌려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신하들이 왕께 물었다.
"폐하, 왜 하맆이면 볶은 흙을 주는 것입니까?"
"당연하지. 혹여 꽃씨가 숨어 있는 흙을 주면 안되니까."
"과연!"
"훌륭하십니다, 폐하!"
신하들은 왕이 듣기 좋은 소리들을 앞다투어 늘어놓았다.

비좁은 감방 안 높다란 곳에 작은 창이 하나 나 있었다. 마치 감옥의 콧구멍과도 같은 그 창문을 통해 하루 한 차례 손바닥만한 햇살이 들이비쳤다. 그러면 정원사는 볶은 흙이 담긴 종지를 창틀에 올려놓고 고스란히 그 햇살을 받았다. 정원사는 이따금씩 자기 몫으로 나오는 물 한 모금을 남겨 그 흙에 뿌려주었다. 그러기를 하루, 이틀, 한 달…. 1년이 훌쩍 지나갔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2년이 흘렀고, 3년이 훌쩍 지난 어느 봄날이었다. 종지에 햇살을 받던 정원사는 흙 접시 가운데에 찍힌 연한 점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갓 움트기 시작한 새싹이었다. 그것을 발견한 정원사의 눈에 감사의 눈물이 맺혔고, 그 이슬방울은 곧장 새싹 위로 굴러 떨어졌다.

"사람이 아무리 두 팔을 쳐들어 막으려 해도 저 높다랗게 지나는 바람은 어쩔 수 없지. 두 손바닥을 활짝 편 넓이 이상의 햇볕을 가릴 수도 없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정원사의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정원사는 그날부터 온갖 정성을 기울여 그 새싹을 가꾸었다.

그로부터 두어 달 후 왕이 그 감옥 곁을 지나가게 되었다. 무심코 감옥 안을 보게 된 왕은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니, 저건 무슨 꽃인가?"
감옥 창틀 위에 샛노란 민들레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그 꽃송이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마치 별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왕의 머릿속에 어린 시절의 아름다웠던 추억 한편이 떠 오올랐다. 갈라진 돌 틈에 뿌리를 내린 빈들레꽃을 보고 가슴 떨렸던 기억이었다. 그 때 자기를 훈육했던 스승은 이런 말을 해주었다.

"저것은 단순한 꽃 한 송이가 아닙니다. 바로 생명이지요. 천하보다 귀한 생명 말입니다."
"누가 저걸 키우나요?"
스승은 그때 또렷하게 말했었다.
"햇볕과 비와 바람… 바로 자연이지요."

왕의 귓가에 그 옛날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메아리쳤다. 왕은 비로소 그 스승의 말이 정원사의 대답과 똑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3년전 자기가 감옥에 가둬버린 정원사를 떠올리면서, 꽃 한 송이조차 오직 자기 덕에 피는 줄 알고 살았던 지난날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김하 엮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느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