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작성자	민들레
ㆍ작성일	2007-01-30 (화) 01:49

ㆍ조회: 4027

모대호

중학교 1학년때의 일입니다.
같은 반에 모대호란 친구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모'는 본래의 성이 아니라 익명의 뜻으로 성만을 숨긴 것입니다. 진짜 성이 '모'씨인 분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아무튼 모대호란 녀석이 있었습니다.

선생님들도 기억이 납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참새 선생님하며, '엉'이 크셨던 국모모 '여자' 영어선생님 하며, 소풍때 사이다를 마시다 방귀를 뀌었다 하여 붙여진 '사이다뽕'선생님 하며... 당시엔 국민학교라 했었지만 초등학교를 마치고 새로 진학한 중학교는 그렇게 새록새록 기억할 일들이 많이 생겼습지요.

친구들도 그랬습니다. 도내에서 또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관계로 처음엔 서먹서먹하던 친구들이었지만 어느정도의 세월이 흐르니 제법 가까워졌습니다. 당시에 번호는 키 순서대로 세워 정했는데 나는 1221, 이락년 이반 이십일번인 것이었지요.

보통은 점심 도시락도 끼리끼리 먹는 것인데... 모대호, 그놈은 사십번대 쯤 되었을텐데 우찌우찌하여 점심을 이십번대에서 먹게 되었나 봅니다. 그때엔 한 반이 육십명이었는데 삼십번대 안쪽의 친구들은 보송보송 솜털이었지만 사십번대를 넘으면 콧수염도 제법 시컴해 보일정도이니 덩치 큰 녀석들은 그만큼 형들 행세를 묵시적으로 행했던 것으로 기억되는 시절의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모대호란 놈이 왜 쪼무래기들과 함께 도시락을 먹었을까는 아직도 미제로 남아 있습니다.

어쨌거나 점심을 함께 먹던 어느날, 하늘색 하복을 입었을 무렵이니 오뉴월이 아니었던가 합니다. (역시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여차저차한 관계로 다툼의 말이 오갔던 것 같고 모대호란 놈은 갑자기 입에 문 밥풀떼기를 내 얼굴에 뱉어 냈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자리를 피했는데 한 '깡'했던 낸들 가만 있겠습니까?
도망가는 그놈을 향해 당시에 개구리 모양의 스펀지가 든 안전잉크병을 집어던졌고 그 잉크병은 잉크액으로 그놈의 등에 명중했습니다. 순식간의 일이었지요.

그날 모대호는 온데간데 없었고 나는 점심시간이 끝날때까지 마룻바닥의 잉크자국을 없애려 칼로 긁어내며 불안에 떨었습니다. 만일에 부모님이라도 모셔오면 이건 엄청난 사건으로 비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입었던 당시의 하복은 쭈글쭈글한 무명옷이었는데 그놈이 입었던 것은 뽀쁠린인가 해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것이었으니 바꿔 입는다 해서도 안될 일입니다. 또 그 사실을 우리 부모님께서 아시기라도 한다면... 이건 거의 '책상 부숴지는 날' 일이고 '학교고 나발이고...'가 될 게 뻔한 일이었으닌까요.

다다음날 모대호는 나타났습니다. 말쑥한 교복을 입은채로 말입니다.
지금껏 모대호와 나는 그 사건에 대해 진상을 밝히려는 노력을 서로 게을리 하고 있습니다.

세월은 흘러
요즈음 그 모대호가 많이 보고 싶어집니다. 그 때 그 시절의 교복 미제사건을 해결하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그놈의 특이한 전화질 때문인 것이지요. 그놈은 밥풀떼기 내뱉는 고약한 성질도 있지만 전화만 잡으면 그냥 번호를 눌러대는 묘한 손가락 누름증(?)이 있습니다.

중학교 1칵년 시절의 40몇번 번호답지 않게 키가 눌러 앉아버린 모대호. 고등학교까지 한 교정에서 생활하다가 각자의 갈길을 위한 시간을 갖은 뒤 장가갈 무렵에 모대호와 나는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네모네모회라는 이름 아래 고만고만한 몇놈들이 다시 모인 것이지요. 희미한 기억이지만 요새와서 생각해 보니 모대호란 놈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무전기 스타일의 차량전화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놈은 전화기를 일없이 만지작 거리는가 싶더니 여보세요('세'자에 특이한 어나운서 맨트식으로강조하면서)...로 상대를 부릅니다. '나, 대혼데... 그냥...' 멀컹한 목소리로 몇마디 중얼거리다가 '아랏~~써!' 하면서 깔끔한 목소리로 끊습니다. 그야말로 쓰잘데기 없는 전홥니다.

뭔 전화를 그렇게 해대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히죽히죽 웃으며 뱉은 대답은 '쌍께~!'였습니다.
알고 보니 요즈음의 손전화는 제놈의 명의도 아니었습니다. 할인 혜택을 받고 있는 또 다른 친구놈의 명의로 전화를 내서는 시도때도 없이 '여보세요'를 연발하는 것입니다. 재주도 좋은 놈이지요.

전화하는 습성도 유전일까요? 그놈과 자주 어울려 다녔던 때, 가끔 전화도 옵니다.
아들녀석 모동수한테 온 전화입니다.
'곧 갈께.' 아마도 언제 오느냐고 물었겠지요.
전화가 또 옵니다. '가고 있어.' 오고 있는냐고 물은 거겠죠?
'알았서~, 곧 가. 여기 모모동이야' 어디쯤이냐고 물은 모양입니다.
모모동이던 무무동이던 유치원생 아들녀석이 알 바 없지만 친절하게 이야기 해주는 걸 들을 수 있습니다.
다음엔 전화가 없습니다.

나는 전화에 관한 한, 거는 쪽이 아니고 받는 쪽... 아예 유별나게 수신전용이라고 하여야 맞을 것 같습니다.
모대호가 발신이라면 나는 수신, 나는 왜 전화에 인색한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전화요금이라는 '돈'일까? 일응 그 부분도 있지만 그것이 다는 아닌 것 같습니다. '나, 누군데... 그냥...'이 오직, '그냥'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뭐 특별한 일도 아니면서 괜스레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실례일 수 있겠구나 또는 그런 일로 일없이 전화 하는 것도 그렇고... 등등등.

모대호 그놈이 유치원생 아들에게 '여기 모모동이야'라고 한 것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정녕 자신에 대한 확인일지도 모릅니다. 아들은 이렇게 생각했겠지요. 모모동이던 무무동이던 아빠가 오시고 있는 곳 옆이 바로 우리동이니 금방 오시겠거니...
전화는 업무적인 경우 오가는 시간과 경비를 줄이는 수단입니다. 또 '살아 숨쉰다'고 하는 것에 대한 확인이기도 합니다. 멀리 계시는 부모님이나 친지분들께 아침 저녁으로 문안을 올릴 수 있는 방법 중 이보다 좋은 것은 없을 테니까요. 하물며 의심덩어리인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선 더더군다나 필수일 게구요.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스코트 니어링의 삶을 그림처럼 그린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서 전화(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정확친 않지만 기억키로 내용은 이렇습니다. 스코트가 전화기를 사옵니다. 그런데 전화기는 전화기 콘센트에 꽂혀 있는 게 아니라 늘 창고에 있습니다. 스코트는 전화 할 일이 있으면 코드에 꽂아 통화를 하지만 통화가 끝나면 곧바로 빼서 창고에 가져다 놓습니다. (외람된 판단이겠지만) 최소한의 문명만을 섭생코자한 스코트 니어링의 주관이 밉게 느껴지는 순간이군요.

전화 이야기가 나와 모대호란 놈한테 물은 적이 있습니다.
'부자(父子)가 똑같은데 너의 부친은 어떠셨냐?'
'우리 아버지도 맨날 전화통과 사셨지!'

모대호란 놈으로부터 몇달째 감감 무소식입니다. 참다 못해 전화를 했습니다만 통화가 되질 않더군요.
하지만 그놈에 대한 비관적인 걱정은 없습니다. 그놈은 죽더라도 전화를 걸어 '나 대혼데, 나... 죽을란다.' 할 놈이니까요.

???

양지꽃님 왈(曰) 2007-01-31 14:18	그 잉크병 저도 사연이 있는데.. 저는 맨 앞자리. 국어선생님의 하얀 실내화에 엎질렀지요.다행히 스펀지가 들어있어서 그리 심하진 않았지만. 그때 부터 저의 이름은 '미쓰 모'로 '쓰'는 시옷이 세개 그리고 '쓰 '다음에 '모'는 한참 띄어서 부르시던 국어 선생님 모습이 생각납니다. 아이들에겐 전화는 용건만 간단히 하면서 자신은 잘 안되더군요.ㅎㅎㅎㅎ

민들레님 왈(曰) 2007-01-31 21:31	모가지 잘록한 그 잉크병, 잉크가 새지 않는다는 '안전'인크병이었지만 아무래도 가방 안쪽, 공책이나 책의 모서리를 퍼렇게 물들인 적이 많았었죠. 지금은 뭐 아는 사람만이 기억만으로 아련할 뿐... 문명은 곧 편의일 것이고 문화는 불편도 감수하는 고집이 담긴 것이라는데, 그것을 찾을 수 없는 오늘이고 보면... 요즈음은 고집 있는 사람이 없나 봅니다.

양지꽃님 왈(曰) 2007-02-03 19:04	그 잉크가 안전잉크병이었나요? 그랬었던 것 같네요.잉크병은 항상 조심 조심. 확인 또 확인 뚜껑이 잘 잠겼는지 확인해야했었지요. 파이롯트 잉크라는것도 있었지요.그건 만년필용이었던가요? 잉크병도 추억의 물건이 되었군요